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수 전쟁 (문단 편집) ===== 100만 병력 긍정론 ===== 淺見直一郞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1985 「煬帝第一次高句麗遠征軍 -規模兵種」 『東洋史硏究』, 1985 [[https://repository.kulib.kyoto-u.ac.jp/dspace/bitstream/2433/154105/1/jor044_1_23.pdf|#]] ] >1. 수서 권4 양제의 1차 고구려 원정 때 장문의 조서를 내건 뒤 그 병력의 수에 대하여 총 113만 3800명인데 200만이라 불렀으며, 식량을 운반하는 자는 그의 배라고 한 문장이 있다. 수서와 자치통감에는 이 원정군의 총병력을 추정할 수 있는 사료가 몇가지 남아 있다. 이 사료를 바탕으로 원정군의 총병력을 산출하고 그 결과 현저한 차이가 발견되면 113만이라는 수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반대로 큰 차이가 없다면 수서, 자치통감을 의심하지 않는 한 이 병력 수를 의문으로 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 >2. 수서 이혼의 기사에는 615년 3월에 모반 혐의로 일족과 함께 이민의 처가 이혼이 이민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한 것을 들었다고 말하였다. >'만일 다시 요하를 건너게 된다면 나와 너는 반드시 대장이 된다. 1군당 2만여명이니까 그것만으로 5만이 된다.... 그때 우리 집안 자제들은 병마를 호령하여 틈을 보아 어전을 습격하고 각 군 대장을 죽이면 천하는 정해진다.' >뒤늦게 이 근언은 허위이며 사건 자체도 날조된 것을 알았지만 이 내용이 당시 사람들이 모반으로 믿게 할 만한 것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여기서 1군당 병사 수가 2만 수천, 2군을 합해서 5만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면 4차 원정군 중 1개 군의 병력은 약 25,000명이 된다. > >3. 4차 원정군을 1차 원정군과 결부시키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원정군의 24군과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고 본다. 여기에 서술된 원정군 편제는 1차 원정군과 일치하며 한 군의 위치도 24군과 같기 때문이다. 이 4차 원정군에는 어영과 여러 군이 있는데 1차 원정군의 24군과 마찬가지로 대장이 한 사람씩 놓여 있었고 이혼과 이민이 임명될 예정이었는데 그들은 우희위대장군과 승작감이며, 이것은 1차 원정군의 24군 대장들과 동격인 것이다. > >4. 병력 수를 알 수 있는 사료가 하나 더 있는데 수서 권8 예의에 따르면 1군에는 대장·아장 각 1명, 기병은 40대, 대는 100인으로 한 군으로 배치. 보졸은 80대. 그 외에도 대장 주변에 200기, 신락이 500기 및 보중병, 산병, 종자, 군악대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병과 기병의 합이 1만 2천명이 되는데, 이는 기병과 보병의 비율이 1대2가 된다. 보졸은 각군 80대만 기록되어 있을 뿐 1대가 몇명인지는 기록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1대를 200명으로 가정하면 전부 1만6천명이 되고 기보 비율은 1대4가 되는데 이는 불확실한 요소가 많기에 기병과 마찬가지로 1대 100명이었을 것이다. > >5. 해로군은 육군과는 별도로 배가 300척이었고, 이들이 평양으로 처들어가려고 할 때 4만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수부 1만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5만 이상의 병력이었다. > >6. 수서 요동의 역에서는 우둔위로군 이하 어관 내 3만인의 노병 기록이 있는데 천자 6군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내외전후좌우의 6군으로 이뤄졌다. 이 6군은 24군의 1군과 비슷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24군의 60만과 6군의 15만, 해로군 5만을 합쳐 도합 80만이 된다. > >7. 이 80만과 113만의 수치에는 간격이 있지만 검토가 극히 대략적이었다는 점, 간격이 있을 경우 적은 수를 가정한 것, 일부 다른 해로군과 이민족 군, 경장 유군 등이 산입되지 않은 것을 가정하면 113만이라는 숫자를 의심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현존하는 사료 중에 원정군이 더 존재한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그 차이는 더 좁을 가능성이 크다. 김선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隋 煬帝의 軍制改革과 高句麗遠征, 2003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924440|#]] ] >1. 양제는 중국의 1군도 안되는 인구를 가진 고구려를 치는데 무려 113만을 동원하였고, 또 3차 원정만으로도 모자라 4차 원정을 준비하였으며 그것도 반란봉기가 동부를 위협할정도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였다. > >2. 대업 7년 4월의 징병을 일러 '사람을 모집했다(募人)'고 했는데, 이때의 '募'는 지원에 의한 모병이 아닌 징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募人이 일반의 민정이 아니라 특별히 효용한 자를 징발했다는 것은 두건덕과 손안조의 예를 보아 알 수 있다. 양제는 부병만이 아니라 민간의 효용자들을 대거 징발했던 것이다. > >3. 별도로 4월 배 300척을 만들게 하고 동시에 장강 이남의 수수 1만, 노수 3만, 배찬수 3만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다시 5월에는 군수 5만승을 만들어 고군으로 보내되 옷과, 갑옷, 천막, 군막을 실어 병사로 하여금 직접 끌도록 하고, 7월에는 장강 이남의 민부와 배를 징발하여 탁군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다. > >4. 1차 원정의 병력은 공식적으로 200만 실제로는 113만 8천명이라고 한다. 그 중 반수가 부병이라는 추산도 있지만 설사 나머지 반이 모인이라 하더라도 절대수로 보아 대단한 규모임에는 틀림없다. > >5.별동대는 우문술과 우중문 등 30만5천명의 9개군 병력이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으나 결과는 9군 30만5천명 중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가는 대패를 기록했을 뿐이다. > >6. 대업11년 우희위대장군 이혼과 승작감 이민의 모반 시나리오는 당시 관중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우문술이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지만, 당시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소재로 했기에 양제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우문술이 꾸며낸 반역 모의는 다음과 같다. >"양제가 다시 고구려로 출정하면 너와 나는 필히 대장을 맡을 터인데 1군이 2만여명이므로 둘이 합하면 5만의 병사가 된다. 또 가문의 자손들과 내외의 인척들을 모두 동원하여 참전토록 하고...그렇게 하면 하루만에 천하는 평정될 것이다."라는 각본이었다. > >7. 이와 같이 황제가 친정하여 100만이 넘는 대군의 진퇴를 일일이 챙기려는 태도는 전국에서 불러들인 병사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황제의 일원적 명령체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함으로써 명문출신의 장군으로 부터 사병적 성향의 병사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정재훈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隋 煬帝(604~617)의 對外政策과 天下 巡行, 2004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932413|#]] ] >1. 기존에는 양제 개인의 실패에 대한 평가와 함께 수의 단명이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직접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수당왕조가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기울인 지속적인 노력이 주목되었다. 이와 관련해 수당 통일체제의 성립 과정을 내지 순행(巡行)과 연결지어 살펴보려고 한다. > >2. 607년 4월 북순(北巡)에 나선 양제는 약 5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수도를 출발해 북상했는데, 이런 대규모 행렬은 군사적 시위를 통해 돌궐을 제압하려는 陳兵耀武(군사퍼레이드)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양제는 이러한 북순을 통해 이들을 위압케 하여 장성 밖으로 몰아내려 하였다. 또한 7월부터 장정 백여만을 징발해 위린 동쪽에 장성을 쌓았고, 609년 3월에는 서순(西巡)에 나서 북순 때와 동일하게 50만 군대를 동원해 토욕혼의 잔여 세력 10만을 포위해 투항하게 만들었다. > >3. 607년 북순 당시 돌궐 천막에서 고구려 사신과 조우 후 동순을 준비하였고, 이 고구려 원정 준비는 611년 산동과 하남에 발생한 대규모 수해로 일시 정지되었다가 612년 정월 전국에서 소집된 1,133,800명의 대규모 원정군이 탁군에 집결함에 따라 본격화되었다. 이제까지의 순행에서 늘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던 양제는 이번에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직접 원정을 지휘했다. 그와 동시에 고구려 왕이 언제든지 자신에게 와 사죄를 하고 조공을 할 경우 용서를 하겠다는 명령했다. 이것은 과거 순행과 마찬가지로 무력 시위를 통해 그를 항복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 >4. 이후 평양을 직접 공격했던 水軍이 실패하고 우문술이 이끄는 30만의 별동대마저 을지문덕의 유인술에 말려들어 패퇴하면서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홍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高句麗의 鮮卑族戰爭과 騎兵戰術-특히 前燕·後燕·隋戰爭을 중심으로,2004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0927690|PDF 20쪽]] ] >제2차 침공은 612년(영양왕 23) 양제가 113만 3천 8백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것인데, 2만 4천여 명의 기병을 앞세워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지향하였다. 김창석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수 전쟁의 배경과 전개- 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 2007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238236|#]] ] >1. 113만 3800명의 숫자 중 해로군은 제외된다. > >2. 수서 예의의 기병의 1단이 10대인 반면 보병의 1단이 그 2배인 20대가 되는 기록을 참고했을 때 보병의 1대는 200인이고 1군에 4단 80대 16,000명 정도가 된다. 그 외 대장과 아장의 친위대나 직속부대의 700기, 고취대, 치중융거산병이 있다. > >3. 치중융거산병은 글자의 뜻을 볼때 전투용 중장비와 군수품 운송, 예비병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이며 치중융거산병 역시 4단이었으므로 1대 200인, 20대 1단으로 계산하면 16,000명이 된다. 따라서 1군의 병력은 기병 47,00명, 보병 16,000명, 치중융거산병 16,000명, 기타 인원을 합하여 약 37,000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좌우24군은 약 88만 8000명이 된다. > >4. 황제 직속의 어영군이 6군으로 편성되었으므로 약 222,000명(37,000x6)이다. 이들만 추산하면 약 111만 명이 되는데 이는 1,113,800명과 근사한 수치이다. 약간의 오차는 1대의 병력이 기병, 보병, 치중융거산병, 어영군 사이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산둥에서 별도로 출항한 해로군은 최소 5만이었다. 해로군의 총 병력을 알순 없지만 1백만을 훨씬 넘는 대군이 고구려 원정을 위해 동원된 것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정동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612년 고구려 원정 隋軍의 군단 편성과 兵種 구성, 2016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26603|#]], 613・614년 高句麗-隋 전쟁에 보이는 遼西 상황과 隋軍의 전략, 2019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494927|#]] 612년 高句麗-隋 전쟁의 전개 양상, 2020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585409|#]] ] >1. 탁군에서 매일 한 군이 출발하여 40일이 되어서야 출발을 마쳤다는 기록을 참고해 볼 때, 수나라 육군은 34군 + 天子 6軍 등 모두 40군으로 편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제의 조서에 나온 24군+천자 6군의 30개 군 외에 자치통감과 범안귀(范安貴) 묘지명, 수서 열전 권36, 권37, 권73을 통해 遂城道軍, 增地道軍, 險瀆道軍, 蓋牟道軍, 新城道軍, 盧龍道軍 6개군을 합해 36개의 군명(軍名)을 확인할 수 있다. > >2. 수서 권37 열전 제2 이혼전(李渾傳)에는 이혼(李渾)와 이민(李敏)이 반역자로 몰리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민의 처인 우문씨(宇文氏)는 이혼이 이민에게 만약 요수(遼水)를 다시 넘으면 너와 나는 반드시 대장(大將)이 되고 각 군 2만여명을 합쳐서 5만명을 이끌 수 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거짓 진술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토대로 육군 한 군의 병력수를 파악해 본다면 약 25,000명이 된다. > >3. 자치통감은 육군만 113만 3800명이라 하였지만 수서는 육해군을 합쳐 113만 3800명이라 한 것으로 보았을 때 113만 3800명은 수군을 포함한 숫자이다. 水軍의 병력수와 관련하여 내호아(來護兒)가 수군(水軍) 4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였고 쫓아오는 고구려군에 대해 주법상(周法尙)이 진을 정돈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을 볼 때, 4만명보다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나라는 611년 4월에 수부(水手) 1만명과 노수(弩手) 3만명, 그리고 배찬수(排鑹手) 3만명을 징발한 바 있는 이들은 수군이며, 육군은 1,133,800명에서 水軍 70,000명을 뺀 1,063,8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 >4. 수서에 따르면 보병은 4단(團)이 있었고 각 단(團)에는 20대(隊)로 구성되어 있고, 기병과 마찬가지로 1대를 100명으로 본다면 각 군의 보병 수는 약 8,000명, 기병은 4,000명에 보급을 담당하는 치중융거산병은 13,000명으로 추정된다. > >5. 수서 권68, 열전 제 33 하에 따르면 천자 6군의 경우 노병만 3만으로 천자 1군은 창병 5천과 노병 5천, 기병 5천에 치중융거산병 2만으로 35,000명이다. > >6. 별동대의 경우 자치통감에 기록된 9개군 외 수서 권63, 열전 제28 양의신(楊義臣)의 기록을 통해 肅愼道軍, 수서 권64, 열전 제29 麥의 기록을 통해 蹋頓道軍, 『隋書』 권71, 列傳 제36 遊元의 기록을 통해 蓋牟道軍 등 3개군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합 12개군이 참여하였다. 김성규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 2020,隋末·唐 건국기의 政情과 李世民 당 태종 이세민 연구(1),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42147|PDF 3쪽]] ] >수 말기, 현재의 산동성 일대에서 각종의 반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황하의 범람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611년) 데다 같은 해 말부터 고구려 원정을 위한 병사 징집이 이곳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612년)에 무려 100만 이상의 군대가 투입된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후 두 차례나 더 이어진 무리한 감행에서 수 양제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민심만 급속히 이반되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